"으음… 윤우 오빠…"
닫힌 문틈 사이로 야릇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윤서는 문을 두드리려던 손을 허공에 멈췄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그녀와 고윤우는 한 번도 부부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고윤우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결혼 초, 고윤우는 몸에 문제가 있어 잠자리를 가질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렇다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고윤우가 아닐 것이다.
강윤서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는 그런 자기 위로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일깨워 주었다.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소리였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지만, 강윤서는 흐느끼는 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틀어막았다.
3년 전, 고윤우는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다. 과거 그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있던 그녀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씨 가문에 시집와 2년간 그를 정성껏 간호했다.
그 후 고윤우는 그녀가 남몰래 치료해 준 덕분에 기적적으로 깨어났고,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청혼하며 평생 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강윤서는 그 말을 할 때 그의 눈빛에 담겨 있던 진심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씨 가문의 안주인 역할을 충실히 해냈건만, 결국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이런 배신뿐이란 말인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강윤서는 본능적으로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그때, 방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윤우 오빠, 오늘 오빠랑 강윤서 결혼기념일이잖아. 바보같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집에 안 들어가 봐도 돼? 나랑 여기서 이러는 거, 좀 그렇지 않아? 만약에 들키면 어떡해…"
"뭘 걱정해, 신월아. 내 마음속엔 너 하나뿐이라고 말했잖아. 강윤서 걔는 그냥 장식품일 뿐이야. 시작부터 손끝 하나 댄 적 없어!"
고윤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지만, 그 내용은 비수처럼 차가웠다.
주먹을 꽉 움켜쥔 강윤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벌컥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고윤우!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날 속였어!"
갑작스러운 등장에 고윤우는 하던 행동을 멈칫했다.
그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당겨 자신과 여자의 몸을 가린 뒤, 강윤서를 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여길 어떻게 왔어? 본가에서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고윤우의 태도에 강윤서는 실망감으로 몸이 휘청거렸다.
‘하, 이젠 연기할 생각도 없는 건가?'
그녀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내가 안 왔으면, 대체 언제까지 날 속일 작정이었어?"
고윤우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있던 여자가 강윤서를 향해 말했다. "윤우 오빠 탓하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차라리 저를 탓하세요."
강윤서는 여자를 힐끗 쳐다봤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었다.
고윤우의 소꿉친구, 영신월이었다.
신혼 초, 고윤우의 책상 위에는 영신월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결혼 후 사진이 사라졌을 때, 강윤서는 그가 영신월을 정리했다고 믿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녀는 영신월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고윤우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헤어지고 싶었으면 말을 똑바로 하지 그랬어. 왜 하필 우리 결혼기념일에 이런 짓을 하는 건데?"
"흥, 좋아." 고윤우는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그럼 지금 확실히 해두지. 너랑 이혼하겠어. 이 집 사모님 자리는 원래 신월이 거였어."
그의 차갑게 식은 눈빛을 마주한 강윤서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지만, 의외로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이혼해요. 대신 혼인 재산은 정확히 절반 나눠야겠어요. 한 푼도 양보 못 해요."
고윤우와 영신월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다.
고아인 강윤서가 감히 고씨 가문의 재산을 나누자고 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영신월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선심 쓰는 척하며 강윤서를 설득했다. "강윤서, 너 정말 철이 없구나. 결혼하고 쭉 윤우 오빠가 벌어온 돈으로 살았잖아. 넌 그냥 전업주부였고, 고씨 가문에서 너한테 부족하게 해준 거 없어.
꼭 이렇게 얼굴 붉혀야 속이 시원하겠어?" "상간녀 주제에 어디서 남의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야?" 강윤서는 차갑게 비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잘 들어. 너희들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니까. 어차피 일 커져봤자 쪽팔린 건 내가 아니거든!"
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나섰다.
별장을 나선 강윤서는 잠시 망설인 후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채 몇 번 가기도 전에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고,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윤서 누나? 드디어 제 생각이 나셨어요!"
"응. 지금 고윤우 개인 별장 앞인데, 나 좀 데리러 와줄래?"
"그럼요!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고급 세단 몇 대가 쏜살같이 달려와 그중 맨 앞에 있던 차가 강윤서의 앞에 멈춰 섰다.
익숙한 얼굴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며 강윤서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쓰레기 같은 남자 하나 때문에 제 빛을 숨기고 부속품처럼 살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늦지 않았어.'
"누나, 무슨 일이에요? 왜 울었어요?"
하서영은 강윤서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강윤서처럼 강한 사람이 울다니?
강윤서는 태연한 얼굴로 손을 뻗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 인간쓰레기랑 이혼했어."
"이혼이요?" 하서영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멍하니 있다가, 이내 활짝 웃음을 터뜨렸다. "와… 너무 잘됐어요, 누나! 드디어 정신 차리셨네요! 이 아우가 우리 형님의 귀환을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