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스로에게 이건 그저 의존일 뿐이라고 되뇌었지만, 작은 아버지를 좋아하는 마음을 도무지 억누를 수 없었다. 작은 아버지, 윤아는 작은 아버지를 좋아해요.]
일기장을 낭독하는 남학생의 이상한 억양은 서윤아가 조심스럽게 숨겨둔 비굴한 기대를 낱낱이 파헤쳐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수치심과 분노, 그리고 당혹감이 끊임없이 밀려와 소녀의 자존심을 조금씩 무너뜨렸다.
"내놔!"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 서윤아가 발뒤꿈치를 들고 일기장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자 남학생은 몸을 옆으로 피하며 목소리를 깔고 더욱 과장된 억양으로 외쳤다. "작은 아버지, 윤아는 작은 아버지를 좋아해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누군가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부모를 잡아먹은 불길한 년, 뻔뻔한 계집애!"
"불길한 년, 뻔뻔한 계집애, 불길한 년, 뻔뻔한 계집애!"
일기장은 여러 남학생들의 손을 거쳐 전해졌고, 악의 담긴 욕설은 서윤아에게서 시작해 이미 세상을 떠난 그녀의 부모님에게까지 번져 갔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민 서윤아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더니 의자를 번쩍 들어 올려 힘껏 휘둘렀다.
그때, 새하얀 셔츠를 단정하게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무실 전체가 환하게 밝아지는 듯했다.
서윤아를 꾸짖고 있던 여교사는 바로 표정을 바꾸고 목소리를 낮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고윤택입니다." 그는 머리가 헝클어진 서윤아를 흘깃 쳐다보며 차분하게 덧붙였다. "서윤아의 작은 아버지입니다."
그 순간, 선생님은 비로소 서윤아가 왜 작음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아 일기장을 가득 채웠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서윤아는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았다. 손가락과 심장이 꽉 조여 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약 30분 후, 서윤아는 조용히 그의 차량 뒷자리에 몸을 실었다.
밀폐된 공간에는 은은하게 배어나는 그의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했다. 평소 같으면 이 향기만 맡아도 안도함을 느꼈겠지만, 지금의 서윤아에게는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들 뿐이었다.
작은 아버지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한참이 지나서야 서윤아는 용기를 내어 그의 굳게 닫힌 옆모습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작은 아버지…"
고윤택은 손을 들어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그의 얼굴 표정을 흐리게 만들었고, 서윤아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심장이 답답하게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후에야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수능에 참가하지 않아도 돼. 내가 해외 학교에 신청해서 유학을 보내줄게."
그의 말은 마치 서윤아의 머리 위에 떨어진 벼락과 같았다.
그녀는 산산조각날 듯한 충격 속에서 애처롭게 말했다. "안 돼요. 저는 수능에 참가할 거예요. 홍대의 생물 제약학과에 꼭 입학하고 말 거예요…"
"해외에도 좋은 대학이 차고 넘쳐. 몇 년 공부하고 돌아와 공무원 시험을 보면, 내가 널 편한 부서에 넣어줄게."
고씨 가문은 대대로 정치계에 몸담아 온 집안이었고, 작은아버지는 그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인재였다. 젊은 나이에 이미 어느 부서의 비서실장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를 들은 서윤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는 세상의 잔혹함을 아직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는 왜 고윤택을 좋아하면 안 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혈연관계도 아닌데 말이다.
또한 왜 작은 아버지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능을 포기하게 만들어 그녀를 벌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서윤아는 어릴 적부터 불안감을 느끼는 아이였다. 그녀의 엄마는 그녀가 7살 때 세상을 떠났고, 3년 후 경찰인 아빠는 바다에 빠진 두 대학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몇몇 친척들은 아빠의 보상금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치고 받고 싸우기까지 했다.
고모는 보상금을 차지했으면서도 정작 서윤아는 돌보지 않았다. 평소에 그녀에게 먹을 것도 제대로 챙겨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수시로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고 비가 오는 날에는 집 밖으로 내쫓기까지 했다.
고윤택은 서윤아의 아빠가 구한 대학생 중 한 명으로, 결국 서윤아를 입양하게 되었다.
학대에 시달린 고양이처럼, 고씨 가문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서윤아는 두려움에 떨었다.
고윤택은 그런 그녀를 정성껏 돌보았고, 어느새 그는 서윤아의 세상에서 유일한 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제 작은아버지마저 그녀를 포기하려 한다…
"작은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 제발 수능에 참가하게 해 주세요. 홍대에 지원하지 않을게요.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도 괜찮아요."
고윤택은 눈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가여운 모습을 보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정성스럽게 가꿔 온 장미가 시들어가는 모습을 어떻게 가만히 지켜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를 겁주어 불륜의 마음을 완전히 끊게 해야 했다.
고윤택은 그녀의 신분증과 수험표를 빼앗고 시험 전날에 돌려주기로 했다.
이런 행동이 그녀의 수능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그녀에게 마련해 준 것은 이미 수많은 학생들이 평생 바래도 닿지 못하는 종착점이나 다름없었다.
고윤택은 서윤아를 방에 가두고 일부러 만나지 않았으며, 그녀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시험 전날 밤이 되자, 서윤아는 미칠 지경이었다.
3년 동안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한 그녀의 손가락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박혔고, 풀이한 문제지는 몇 미터 높이로 쌓였다.
수능은 그녀의 미래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청춘 시절의 중요한 도전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고씨 가문의 별장은 깊은 적막에 휩싸였다. 가족들은 모두 연회에 참석하러 외출했다.
서윤아는 몰래 방을 빠져나와 발소리를 최대한 죽인 채 고윤택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는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신분증과 수험표를 끝내 찾지 못했다.
절망에 빠진 그녀는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그러나 일이 커지면 고씨 가문에 피해를 줄까 봐 두려웠고, 고윤택이 자신을 영원히 용서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녀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절친인 고영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고영교는 고씨 가문의 다른 방계 자손으로, 고윤택을 작은 아버지라고 불렀고 서윤아가 고씨 가문에 온 후 사귄 유일한 친구였다.
"윤아야, 빨리 와. 작은 아버지가 술에 취했어. 수험표가 작은 아버지 옷 주머니에 있는 것 같아."
잠시 후, 서윤아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고영교를 찾았다.
두 소녀는 구석에 조용히 웅크려 앉아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고, 고영교는 그녀에게 과일주 한 잔을 건네며 말했다.
"윤아야, 힘내. 내일 시험장에서 만나자. 너는 꼭 홍대 생물 제약학과에 합격할 수 있을 거야. 앞으로 알츠하이머병 치료제를 개발해서, 너의 엄마처럼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들어 줘."
서윤아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엄마는 40세도 되지 않은 나이에 희귀병에 걸렸고, 그녀를 학교에서 데려오는 길에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서윤아는 엄마가 차에 치여 피투성이 된 채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날 , 그녀는 엄마의 영정 앞에서 굳게 맹세했다. 어른이 되면 반드시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을 개발하여, 다른 아이들이 엄마를 잃는 아픔을 겪지 않게 하겠다고 말이다.
이것은 그녀의 꿈이 아니라 하나의 집착이었다.
과일주를 단숨에 마신 서윤아는 고영교가 건넨 룸 카드를 들고 3206호 문을 열었다.
그녀의 뒤편 복도에서, 고영교는 휴대폰을 꺼내 카톡을 보냈다. 호텔의 어두운 조명 아래, 화면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음산하게 깜빡였다.
이때의 서윤아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밤에 벌어질 모든 일이 그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악몽이 될 것이며, 그녀가 해외로 추방되는 시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