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6시, 운해시 중앙병원.
수술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박은영은 남자친구 육정찬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다.
[은영아, 오늘 야근이라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것 같아. 나 기다리지 말고 일찍 쉬어.]
오늘은 그녀와 육정찬이 연애를 시작한 지 3주년이 되는 날이다.
박은영은 원래 퇴근 후 집에 돌아가 직접 저녁을 준비한 뒤, 육정찬이 퇴근하기를 기다려 함께 기념일을 축하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정성껏 준비해 온 선물도 그에게 건네줄 계획이었다.
육정찬이 반년 동안이나 진전이 없었던 프로젝트를 박은영이 여러 방법을 동원한 끝에 드디어 성사시켰다.
하지만 육정찬은 너무 바빴다.
지난 3년 동안 육씨 그룹을 책임지고 있는 그는 접대와 회식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고, 박은영은 이미 익숙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분원으로 파견 근무를 나오게 된 사실도 육정찬에게 말하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응급실 간호사가 다급하게 박은영의 사무실로 뛰어 들어왔다.
"박 의사님! 방금 응급실에 급성 황체 파열로 복강 내 대량 출혈이 발생한 환자가 이송됐습니다. 상황이 매우 위급합니다!"
박은영의 안색이 순간 굳어지더니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간호사를 따라 밖으로 나가는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며 물었다. "원인 파악했어요? 외력 충격 때문이에요, 아니면 자발성 파열이에요?"
그 말에 간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음, 그게... 성관계가 너무 격렬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박은영은 더 묻지 않고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산부인과 의사인 그녀는 이런 일을 많이 겪어왔다. 대부분 젊은 연인들이 혈기 왕성한 나이에 절제하지 못하고 무리한 성관계를 맺어 발생하는 일이었다.
응급실에 들어서자마자 박은영은 화가 잔뜩 난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의사는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야!"
"사람이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 치료는 할 거야 말 거야!"
그 목소리를 들은 박은영은 순간 발걸음을 멈추고 자리에 얼어붙었다.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훑던 그녀의 시선은 들것 곁에 서 있는 훤칠한 남자에게 고정했다.
그 남자는 바로 육정찬이었다.
야근 때문에 기념일을 함께 보내지 못한다고 했던 남자였다.
지금 육정찬은 거의 기절할 지경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자를 긴장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박은영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의사 선생님이 오셨어요!" 간호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소리를 들은 육정찬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하얀 가운을 입고 마스크를 쓴 여의사가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본 육정찬은 목청을 높이며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빨리 환자부터 살려! 환자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병원 전체가 책임져야 할 거야!"
박은영은 아무 말 없이 육정찬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의 앞에서 늘 온화했던 그 얼굴은 지금 다른 여자의 안전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흉악한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박은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손톱이 손바닥을 깊게 파고들 만큼 힘을 주었다.
마스크를 벗지도, 달려가 따지지도 않은 그녀는 그저 차갑게 명령을 내렸다.
"혈액 은행에 혈액을 준비하라고 연락하고 이 환자를 1번 수술실로 옮기세요."
그 말에 육정찬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의사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박은영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들렸다.
하지만 육정찬은 곧바로 그 생각을 부정했다.
박은영은 제1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다음 순간, 그의 모든 관심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여자의 몸에 쏠렸다.
잠시 후 수술실 문이 닫히고, 빨간 불이 켜졌다.
무영등 아래, 박은영은 메스를 단단히 잡고 있었다.
절개를 진행하고, 출혈을 막고, 파열된 부위를 찾아내 손끝 하나 흔들림 없이 봉합을 이어 갔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른 끝에 수술이 드디어 끝났다.
박은영은 이동식 병상을 밀고 나오는 의료진을 따라 수술실을 나섰다.
문이 열리는 순간, 육정찬이 복도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들것 옆으로 달려가더니 여자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것을 발견했다.
"소유야, 이제 괜찮아. 내가 있잖아..."
박은영은 육정찬을 차갑게 흘겨보고는 바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사무실로 돌아온 그녀는 프로젝트 계약서를 꺼내더니 손으로 한 장씩 천천히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고 병원을 나선 그녀는 택시를 타고 육정찬과 결혼을 약속한 신혼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