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님, 정말 도련님과 이혼하실 겁니까?" 주씨 가문의 남 집사가 눈앞에 있는 이혼 합의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 실망한 기색이 보였다.
은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아저씨. 이미 결심했어요. 이 서류를..."
은하진은 이름 뿐인 남편을 결혼식 이후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말을 멈췄다. 1년이 지났고, 그녀는 지금 그의 이름 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남 집사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도련님께 전해줘요."
남 집사는 은하진에게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유하려 했으나, 은하진의 온화한 눈빛 속에 담긴 단호한 결의를 보고 마음을 바꿔 이혼 합의서를 넘겨받았다.
어쩐지 그는 다소 낙담하는 듯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잘 지내셔야 합니다."
은하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캐리어를 끌고 저택을 나온 그녀는 전에 없던 안도감을 느꼈다.
어쩌면 유명무실한 결혼을 이어가는 것보다 이혼이 그녀에게는 더 나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부터 그녀는 인생의 새로운 한 페이지를 시작할 것이다.
황혼의 하늘은 점차 짙은 주황색에서 어둠으로 바뀌었으나, 주 씨 그룹의 본사는 여전히 불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최상층 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막 회의를 마친 주영욱이 나타났다.
그의 비서인 김지운은 그에게 다음 안건에 대해 브리핑할 준비를 하며 바짝 따라왔다.
"대표님, 30분 후에 화상 회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남기찬 씨가 대표님의 복귀를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거부해." 주영욱은 그의 말을 끊고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김지운 비서는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네, 대표님."
그는 잠깐 멈추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대표님,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게 있습니다."
주영욱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김지운을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왜 그렇게 꾸물대?"
김지운은 재빨리 말했다. "남 집사님이 전화가 왔었습니다. 사모님께서 이혼 합의서에 서명하셨다고 합니다."
김지운은 주영욱 앞에서 직접 그 여자를 언급하는 것이 조금 불안했는지 그의 시선을 피하며 머리를 숙였다.
잠시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주영욱이 아무 말 없이 넘어가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그 때, 김지운은 소름 끼치는 코웃음 소리를 들었다.
주영욱이 그런 코웃음을 치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기분이 아주 언짢을 때만 나타난다.
김지운은 수년 간 주영욱을 위해 일해 왔기에 잘 알고 있었다.
긴장감을 느낀 김지운은 식은땀을 흘렸다.
주영욱은 시선을 높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합의서 나한테 보내."
김지운은 고개를 재빨리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대표님."
얼마 후 주영욱은 이혼 합의서를 받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의 시선은 "은하진"이라는 서명에 닿았다.
주영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이름을 바라봤다. 경멸감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이 여자는 돈 때문에 그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이혼을 제안하다니.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까?
주영욱은 조건 중 하나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렇지도 않게 이혼 합의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은하진은 모든 결혼 재산을 포기할 것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1년 전에 그녀가 주씨 집안한테 빌린 돈과 그 이자를 합해 모두 갚았다는 메모도 있었다.
주영욱은 약간 의외였다. 그는 은하진이 빚을 갚을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은하진에 대하여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닌지 주영욱은 조금 의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까지 돈에 눈이 먼 여자가 아니였다는 것인가?
갑자기 전화 벨 소리가 울려 그의 생각을 중단시켰다. 그의 할머니 서화옥의 전화였다.
주영욱은 눈썹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서화옥의 초조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영욱아! 하진이와의 이혼, 나는 허락 못한다!"
주영욱은 눈을 가늘게 뜨고 비꼬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식이 빠르시네요. 할머니."
할머니는 그가 이혼 합의서를 받자마자 전화를 걸어 서명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정말 이런 우연이 있다고? 은하진 그 여자가 이 모든 일을 꾸몄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여자가 아니었다!
서화옥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중점이 아니잖아! 어쨌든 하진이와 이혼하면 안 된다! 영욱아, 할머니는 참 너를 모르겠구나. 하진이가 얼마나 착하고 좋은 아이인데, 왜 그 아이의 존재를 감사히 여기지 않는 거니?"
주영욱은 책상 위에 이혼 합의서를 내려놓고 설명했다. "할머니, 이혼을 요구한 건 은하진 씨예요."
서화옥은 결연히 말했다. "지난 1년 동안 넌 줄곧 그 아이를 소외했잖니. 아무리 강한 여자라도 이렇게 냉담한 남편을 견디기 어려울 거야!"
주영욱은 좌절감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는 할머니가 왜 은하진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압력까지 가하여 은하진과 결혼하도록 했고, 이혼하려는 지금은 또 가로 막으며 그 여자 편만 들어주고 있었다.
그는 짜증난 듯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지 물어보지도 않았잖아요."
서화옥은 완고한 신념으로 대답했다. "그 아이와 진지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없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거야. 하진이는 착한 아이다. 가까이 다가가 어느 정도 친해지면 너도 분명 그 아이의 매력에 빠져들거다."
주영욱은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서화옥의 주장을 비웃었다.
서화옥은 주영욱의 불만을 눈치채고 계속해서 그를 설득하려 했다. "영욱아, 마지막으로 부탁하마. 하진이가 어떤 아이인지 한 번 알아봐, 응? 그럼 네 생각도 확실히 바뀔 거야!"
"그런 여자를 알아 보라고요?" 주영욱의 어조는 틀림없는 혐오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화옥의 의지는 확고했다. "3개월! 앞으로 3개월만 그 아이와의 결혼을 유지해주렴. 그 후에도 여전히 그 아이와 이혼하고 싶다면 방해하지 않을게! 어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