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이 형, 진짜 그 입양한 여동생을 귀국시킨 거야? 원서아가 화낼까 봐 겁나지도 않아?"
청력을 잃은 지 1년 만에 마침내 회복 된 원서아는 클럽 룸 문밖에 그대로 얼어붙었고 머금고 있던 미소 역시 순간 굳어 버렸다.
'강시연이 귀국했다고?'
"너희만 입 다물면 걘 아무것도 모를 거야..." 강성준의 차가운 목소리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게다가 벌써 1년도 더 지났고, 시연이도 집이 그리웠을 거야..."
"집이 아니라 형을 그리웠겠지."
룸 안에서 말 안 해도 안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난 걔를 그냥 여동생으로만 생각할 뿐이야."
"성준이 형, 아까 강시연이 형한테 입 맞추는 거 내가 다 봤어. 쯧쯧, 그냥 여동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여동생 같던데?"
강성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내가 한눈 판 사이에 걔가 갑자기 다가와서 미처 피하지 못한 것뿐이야... 어린애가 뭘 모르고 그런 건데, 내가 일일이 따질 수는 없잖아."
말을 마친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 경고조로 말했다. "이 일은 너희들 다 입 다물어. 좀 이따 서아 오면 누구도 꺼내지 마, 실수로라도 말하지 말라고!"
그때 누군가 헛기침을 한번 하더니 진지하게 말했다. "성준 형, 진지하게 말하는 건데, 예전에 강시연이 사람 시켜서 원서아를 차로 들이 받은 일이 있었잖아. 정말 그냥 넘어갈 거야? 그 일로 원서아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고 지금까지도 소리를 못 듣잖아."
강성준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연이는 그때 겨우 19살이었어, 철이 없어서 그랬을 뿐이야. 외국에서 1년 동안 고생하면서 지금은 철이 많이 들었어. 굳이 지난 일을 붙들고 늘어질 필요가 있겠어?"
'철이 없었을 뿐이라고?'
순간, 원서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했다. 벼락을 정통으로 맞아도 이 정도로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황당함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그녀를 덮쳤고 숨도 쉬기 어려웠다.
1년 전, 강성준의 양여동생 강시연은 그를 미친 듯이 쫓아다녔다. 하지만 결국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눈이 확 돌아 버린 강시연은 급기야 사람을 시켜 원서아를 차로 들이 받았다. 그로 인해 원서아는 청력을 잃었다.
크게 분노한 강성준은 가문의 규칙에 따라 벌을 내렸고 강시연은 자칫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하게 맞았다. 위급한 상황에 강성준의 부모, 강창섭과 윤정실이 개입하여 긴급히 그녀를 해외로 보내서야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강성준은 원서아의 귀를 치료하기 위해 거액을 들여 국내외의 유명한 의사들을 찾아다녔고, 한때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원서아의 재활 치료에만 매달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치료 과정은 너무나도 길었다. 그녀가 무너져 내릴 때마다 강성준은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를 끌어안고는 강시연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그녀라고 원망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의사를 찾고 밤낮으로 곁을 지켜주는 강성준을 볼 때면...
적어도, 자신을 뼛속 깊이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났다는 생각에 그녀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감탄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벨벳 상자를 쓰다듬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몰래 맞춘 남자 반지가 들어 있었다.
뜻하지 않은 사고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몇 번이나 미뤄졌다.
이제 청력을 회복했으니, 마침내 소원대로 강성준에게 시집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강성준은 강시연을 귀국시킨 것도 모자라 피해자인 원서아를 대신해 강시연을 제멋대로 용서해 주었다.
정말이지...
너무나 가소로웠다.
원서아의 마음이 차게 식어가던 그때, 주머니 속 휴대폰이 갑자기 진동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야 고개를 숙여 휴대폰을 힐끗 내려다 보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였는데, 여전히 향강에 돌아와 그녀의 의붓 언니 대신 곽씨 집안 둘째 도련님에게 시집 가라는 부탁이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도 엄마는 그녀에게 똑 같은 메시지를 보냈었다.
원씨 가문과 곽씨 가문이 정략결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의붓언니인 원교은은 느닷없이 도망쳐 버렸다.
곽씨 가문은 향강에서 세력이 막강했다. 특히 정략 결혼 상대인 곽씨 집안 둘째 도련님 곽한결은 수단이 잔인하고 무자비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그가 원씨 가문이 감히 파혼을 해 자신을 농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원씨 가문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릴 것이다.
달리 방법이 없었던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원서아에게 전화해 도움을 청했다.
[서아야, 엄마와 네 원 아저씨는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래. 제발 돌아와서 우리 좀 도와주면 안 되겠니?]
이것은 그녀를 데리고 원씨 가문에 시집을 간 어머니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하는 부탁이었다.
계부는 그동안 두 모녀를 잘 대해 줬다. 하지만 원서아는 어머니가 원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몇년 간 어머니는 자신의 모든 정성을 계부와 계언니에게 쏟아 부었다.
그래서 지금껏 원서아는 늘 철든 딸로 살았고, 절대 엄마에게 폐를 끼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엄마의 뜻을 거스른 건 단 두 번뿐이었는데, 그 두 번 모두 강성준 때문이었다.
한번은 강성준을 위해 홀로 향강을 떠났을 때였고, 다른 한 번은 조금 전, 강성준 때문에 대신 결혼해 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을 거절했을 때였다.
원서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그때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이제 청력도 되찾았고 강성준이 자신을 무척 사랑하니 두 사람은 곧 결혼할 거라고...
강성준이라면 반드시 자신을 도와 원씨 가문의 문제도 해결해 줄 거라고...
강성준을 믿는다고 했었다.
원서아는 눈을 감았다. 예리한 칼날에 찔린 듯 심장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주머니 속 반지 상자를 세게 움켜쥐며 목구멍을 뚫고 나올 듯한 떨림을 간신히 억눌렀다.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약속도, 그녀의 세상을 굳건히 지탱해 주던 사랑도 결국 모래 위에 세워진 환상처럼 너무나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 모든 다정함과 보호가 과연 몇 할이 진심이고, 몇 할이 죄책감이며, 또 몇 할이 그저 나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기였을까?'
깊이 숨을 들이마신 원서아는 휴대폰을 꺼내 한 글자씩 천천히 입력했다.
[엄마, 내가 교은 언니 대신 곽씨 가문 둘째 도련님과 결혼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