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별이 몸을 돌려 떠나려 할 때, 룸 안에서 심진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한별은 아무것도 몰라. 설령 안다고 한들 뭘 어쩌겠어?"
"소주 자수 공방은 심씨 그룹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어. 게다가 강한별 어머니의 신장 이식도 이미 두 번이나 조건이 맞는 공여자가 나왔는데, 내가 전부 막아버렸어.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경시에서 감히 누가 감히 수술을 해줄 수 있어?"
그 말이 떨어지자 룸 안에서 순식간에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역시 우리 진우 도련님이야.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니까."
"이런 몹쓸 짓까지 해놓고도, 강한별이 너한테 고맙게 생각하게 만들다니..."
그 말을 들은 강한별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1년 전, 어머니가 요독증 진단을 받자 강한별은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기로 결정했지만, 적합성 검사에서 불일치 판정을 받고 말았다.
병실 문 앞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그녀를 심진우가 품에 안고 위로했다. "한별아, 돈 걱정은 하지 마. 신장 이식 수술에 필요한 신장은 내가 어떻게든 찾아볼게. 이모님은 꼭 괜찮아지실 거야."
강한별은 심진우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굳게 믿은 채 1년을 기다렸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녀의 희망을 짓밟아버린 장본인이 바로 심진우였다.
심진우는 그녀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어머니의 목숨을 이용했다. 치밀어 오른 분노가 그녀의 오장육부를 활활 불태웠다.
무려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녀는 바보처럼 속아왔던 것이다.
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중앙병원입니다. 장숙란 환자분이 투석 중 혈전이 발생했는데, 지금 상황이 위급합니다!"
머릿속이 하얘진 강한별은 심진우에게 달려들어 따질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수술실로 옮겨진 뒤였고, 간호사는 급히 그녀에게 서류를 건네주었다.
"위급 상황 통지서에 서명해 주세요. 주임 의사들이 모두 수술 중이라, 지금은 수술을 맡을 수 있는 의사가 없습니다."
"수술을 맡을 수 있는 의사가 없다는 게 무슨 말이죠?" 강한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환자의 신부전이 워낙 심각해서 난이도가 아주 높은 수술입니다. 일반 의사 선생님은 감당하기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훤칠한 체격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가죽 장갑을 벗었고, 길고 하얀 손가락이 드러났다.
그의 뒤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긴장한 얼굴로 환자의 상태를 보고하고 있었다.
"주, 주 선생님?" 간호사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해외에서 막 귀국하신 거 아니에요? 장 과장님이 먼저 좀 쉬시라고 하셨는데요."
남자는 짧게 잘라 말했다. "사진 줘바."
레지던트 의사는 서둘러 MRI사진을 건넸다
강한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깊고 짙은 한 쌍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녀는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바로 주강준, 경시 주씨 가문의 태자이자 심진우의 약혼녀인 주성미의 작은 삼촌이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 순간, 강한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익숙한 느낌이 밀려왔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몇 초 머물렀다.
날카로운 시선과 함께 아주 미세한 떨림이 느껴지더니, 다시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판단은 아주 빨랐는데 손가락으로 필름의 한 곳을 가리켰다.
"마취과에 연락해. 중재 시술로 혈전을 제거할 거야. 5분 뒤 수술실로 들어갈게."
간호사는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수술 예치금은..."
"응급 우선 절차로 바로 진행해. 비용은 내가 사인해서 담보할게."
강한별은 온몸이 흠칫 떨리더니 나지막한 어조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병원 복도에는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가득했다.
강한별은 머릿속으로 공방의 마지막 납품 대금이 언제쯤 입금될지 계산했다. 어떻게든 4천만 원을 마련해, 주 의사에게 돌려줘야 했다.
곧이어 그녀는 이를 악물고 심진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통화가 연결되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주성미의 목소리였다.
"진우 씨,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응." 곧 심진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강한별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아버지인 강건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수술비로 4천만 원이 필요해요. 월요일에 바로 갚을게요..."
"4천만 원?" 강건국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심진우와 6년이나 같이 있었는데 그 정도 돈도 없어?"
"내가 전에 심진우에게 잘 말해서 심씨 그룹과의 계약을 따달라고 부탁했을 때, 넌 고고한 척하며 거절했지. 이제 돈이 없으니 아빠가 생각났어? 이미 늦었어!"
다음 순간, 전화가 거칠게 끊겼다.
강한별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술은 두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수술실에서 나온 주강준은 무균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혈전은 제거했어요. 당분간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신장 이식 수술을 빨리 받아야 해요. 이따가 내 사무실로 와서 서명하세요."
"네. 주 의사님 감사합니다."
중환자실 밖,
강한별은 의식을 잃은 어머니를 보며 심진우의 말을 떠올렸다. 심씨 가문은 그녀가 감히 맞설 수 없는 집안이다.
막강한 심씨 가문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구하려면, 더 든든한 나무가 필요했다.
주강준은 주씨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이자, 어머니의 주치의였다.
그의 도움을 받으면 어머니는 살 수 있고, 심진우 역시 주씨 가문과의 혼인을 위해 그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터였다.
방금 자신을 도와준 남자를 끌어들이려는 생각은 너무나도 뻔뻔하고 위험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생각은 그녀의 이성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 진창에서 자신을 끌어내줄 무언가를 붙잡아야 했다. 어쩌면 심씨 가문까지 함께 끌어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한별은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며 눈물을 닦아내고 가볍게 화장을 고친 후 주강준의 사무실을 찾았다.
남자는 책상 뒤에 앉아 환자 차트를 살펴보고 있었다.
"주 의사님, 죄송한데 어머니 신장 이식 수술에 필요한 신장을 신청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주강준은 고개를 들고 그녀의 빨개진 눈가를 쳐다보더니 잠시 침묵했다.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비도 꼭 갚을 게요. 연락처를 알려 주시면 돈이 마련되는 대로 바로 보내드릴게요."
"그럴 필요 없어요." 주강준은 서랍을 열고 은행 카드를 꺼내 책상 모서리에 올려놓았다.
"돈은 여기에 입금해 주세요. 비밀번호는 내 생일이에요."
주강준의 연락처를 받지 못한 강한별은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은행 카드를 손에 쥐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생일이..."
주강준은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차갑게 식은 눈빛으로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990728."
"네, 주 의사님, 꼭 기억할게요."
"정말 기억했어요?" 주강준의 목소리가 갑자기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강한별 씨는 기억력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그의 목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원망과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강한별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더 묻지 않고 포스트잇을 찢어 자신의 전화번호를 적은 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순간 그녀의 손끝이 남자의 따뜻한 손바닥을 스쳤다.
주강준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움츠렸다.
"주 의사님, 제 전화번호예요.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문이 닫히자 주강준은 포스트잇을 손에 쥐었다.
포스트잇에 적힌 번호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더욱 짙어지더니 손끝에 힘을 빼자 포스트잇이 쓰레기통에 떨어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