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음 역시 언니를 불쌍히 여겼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녀는 자신의 언니에게 당하여 이 엄동설한에 뒷산의 깊은 골짜기에 버려지면서 다리 한쪽까지 부러지게 된 것이었다.
사마음은 자욱한 하늘에서 눈꽃이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눈꽃은 홑옷을 입고 있는 그녀의 몸에 떨어졌고 온몸이 치가 떨리게 아팠다.
힘써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였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이 시간에...
설마, 또 지난 생처럼 밤 연회가 끝난 뒤까지 버텨야 가증스러운 사윤설이 날 주워가는 걸까?
"사마음!"
먼 곳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릿한 목소리는 점차 또렷해졌다.
사마음은 눈을 번쩍 뜨고 온갖 힘을 다하여 외쳤다. "저는 여기에 있습니다."
장화가 눈을 밟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고 큰 그림자가 눈 앞을 가렸다. 사마음은 차갑고 준수한 얼굴을 가진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윽한 눈빛으로 사마음을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품위가 있군, 이리도 추운 날 심산유곡에 누워있다니..."
"만약 이때 딱 마침, 늑대 몇 마리가 지나가기라도 하면 시체를 거둘 필요도 없겠군."
조롱이 가득 담긴 말에 사마음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전생에서도 이 사내는 똑같이 차갑고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그녀를 대했지만 결국은 그녀를 꽉 끌어안은 채, 수많은 화살에 찔려 눈밭에서 목숨을 잃었었다.
"이혁 오라버니, 너무 아픕니다..."
사마음은 흐느끼며 말했다.
이혁은 천자의 태부이자 추밀원의 정사로서 금군을 관리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황제의 곁에 있는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고 조정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는 일 처리에 있어서 늘 무자비했고 조정의 모든 사람에게 간신으로 불렸지만 그녀에게만 특별하였다.
하지만 지난 생의 사마음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없었기에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이혁을 간신으로 대했고 결국 그를 죽게 만들었다.
"이제서야 아픈 줄 알겠느냐? 내가 고심하여 충고할 때에는 들은 체 만체하였으면서."
이혁은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지만 바로 겉옷을 벗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감싸 안았으면서 산골짜기 밖을 향해 걸어갔다.
사마음은 얌전히 그의 품 속에 안겨 있었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혁 오라버니, 송구합니다..."
"이제 와서 잘못을 인정하여도 소용 없다. 송씨 집안의 그 놈이 널 이리 만든 것은 내 기필코 청산할 것이다." 이혁은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마음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그 빚들은, 제대로 청산해야지요..."
목운산장 문앞.
명문 집안의 공자와 아가씨들이 산장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었으며 웃음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이 숙산에서 아주 멋진 경치가 보인다는 소문은 진작에 들었습니다. 바로 저 산꼭대기에 있는 십리매림이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송씨 집안의 개인재산이어서 평소에는 올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늘 이리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윤설 아가씨의 덕분이지요."
"그렇지요. 윤설 아가씨의 초대가 없었더라면 둘째 공자님의 그 성질에 절대 저희를 가까이 들이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사람들은 분홍색 비단옷을 입고 있는 여인을 둘러싸고 웃으면서 말했다.
사윤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의 아첨을 즐겼다.
"참."
한 여인이 갑자기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산장의 사람들은 다 흩어졌는데 어찌 마음이가 보이지 않는 거지요?"
"어디 구석에서 홀로 삐지고 있겠지요."
다른 한 사람이 깔보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윤설 아가씨께서 둘째 공자와 말을 몇 마디 더 나누셨다고 그리 악설을 퍼붓더니.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숨어 억울한 척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역겹기 그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갑자기 청량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 "둘째 공자님."
원안후작 댁의 둘째 공자 송승안은 청풍제월한 청년이었고 젊은 나이에 벌써 한림원의 편수(編修:중국에서 옛날 국사편찬에 종사하던 사관)를 맡게 되었기에 전도가 양양하였다.
"마침 마음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화가 나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사윤설은 입술을 깨물고 조금 흥분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안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찾으러 가야 하겠습니다! 이리도 추운 날에 계속 밖에 있다가 고뿔이라도 걸리면 안되니까요..."
송승안은 얼마 전, 사마음이 성질을 부리는 교만한 표정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사윤설의 손을 붙잡고 따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가기는 어디를 간다는 거지? 성질을 부리려거든 마음껏 부리라고 하거라!"
"전부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밖에서 얼어 죽어도 싸지!"
송승안이 그 말을 마치자 주위의 공기는 한껏 싸늘해진 것 같았다.
뒤에서 누군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얼어 죽어도 싸다고 하였소?"
그는 고개를 들자마자 몸집이 큰 남자가 한 여인을 꽁꽁 감싼 채, 그의 눈앞에 서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대인님?"
송승안은 깜짝 놀랐고 그가 품에 안은 여인이 누구인지 자세히 들여다 본 후, 순식간에 안색이 어두워졌다.
"사마음! 사람들이 보는 눈앞에서 다른 남자를 이리도 친근히 끌어안고 있다니. 네 눈에는 약혼자인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이냐!"
"염치도 모르는군!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네 언니가 걱정하는 마음에 아픈 몸으로도 너를 찾으려 떠나려 하였는데 말이야!"
송승안은 매서운 눈빛으로 사마음을 째려보았다. 그는 당장 내려오라고 외치려 할 때, 그녀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치게 되었다.
예전의 순진하고 억울한 눈빛과는 달리,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한 듯 차가웠다.
그는 잠시 멈칫하였다. 그때 사마음이 냉소하며 말했다.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염치는 무슨 염치 말입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송승안은 막연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윤설도 앞으로 나아가며 관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래, 마음아. 왜 그러는 것이냐? 밖에서 다치기라도 한 것이냐?"
사마음은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시선을 향했고 그 얼굴을 보게 된 순간, 눈에서 증오가 들끓어 올랐다.
"제가 왜 그러는 거냐고 물으셨습니까? 언니는 정녕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사윤설은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녀는 사마음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라도 한 듯 그녀의 입을 막으려 하였다.
하지만 사마음보다는 한발 느렸다.
"제가 혼자가 된 틈을 타, 사람을 시켜 저를 기절시키셨지요. 그리고는 뒷산의 산골짜기에 저를 버리셔서 제가 이 꼴이 된 것 아닙니까!"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윤설이가 그리 지독한 일을 저지를 리가 없지 않은가?"
송승안은 미간을 찌푸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다면 제 온몸의 상처는 다 아무 까닭 없이 나타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사마음은 손을 뻗어 겉옷을 걷어 올리고 뒤틀릴 정도로 붉게 부어 오른 발목을 내밀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당신..." 송승안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사윤설은 지독하게도 피가 섞인 동생을 해치려 하였지요. 그리고 당신, 송승안은..."
사마음은 전생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내를 바라보며 역겨운 느낌밖에 들지 않았다.
"제가 산골짜기에 버려져서 생사를 오가고 있을 때, 송 공자는 다른 여인을 안고 그녀에게 지극정성이었지요! 심지어 저한테 염치도 모르냐고 따지다니..."
"그쪽은 그저 무정하고 의리가 없는 쓰레기일 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