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3년 동안 이세인은 끝까지 떠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고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남편을 치료하여 드디어 완치되었는데 그는 오히려 그녀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첫사랑을 귀국시킨거도 모자라 하늘처럼 받들어 아끼고 보살펴 주었다. 의기소침한 강운당은 이혼을 결심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명문 가문에서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이 되었다고 비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어려운 신의'백소담', 팬들이 열광하는 레이싱 챔피언'이사벨', 심지어 국제 최고 건축 디자이너'성은'으로 변신했다. 쓰레기 같은 남자와 내연녀는 그녀를 더 이상 아까이 할 사람은 없을거라고 조롱했지만, 전남편의 작은 삼촌인 군통님이 10만 부대를 데리고 돌아와 그녀에게 청혼할 줄이야.
"아흣, 석준 오빠..."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야릿한 신음소리에 문을 두드리려던 이세인은 그만 자리에 얼어붙었다.
등골을 따라 오한이 들면서, 찬물을 뒤집어쓴 듯, 손끝에서부터 몸 속 깊숙이까지 서늘한 한기가 파고들었다.
그녀와 장석준은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났지만, 첫날밤은 물론이고 아직까지도 잠자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세인은 답답하게 미여 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부인하려 했다. 아니야, 석준 씨가 날 배신할 리 없어.
결혼식 날, 장석준은 자신이 발기부전을 비롯한 지병을 앓고 있다며 잠자리를 할 수 없는 몸이라고 고백했었다. 그러니 안에 있는 사람은 절대 그 사람일 리 없다.
이세인은 떨리는 손으로 귀를 막으며 헛된 거짓말로 자신을 설득하려고 애썼다. 그런 그녀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곧이어 들려오는 남자의 신음소리가 그녀의 부질없는 환상을 산산조각 냈다.
너무나 익숙한 것이,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목소리가 확실했다.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에, 차가운 벽에 간신히 등을 기대어 숨을 몰아 쉬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왔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한 손으로 있는 힘껏 입을 틀어막았다.
3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장석준은 혼수상태에 빠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이세인은 다른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장씨 가문을 찾아가, 2년 가까이 장석준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다. 단지 장석준이 그녀를 사고에서 구해준 적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사실상 장석준은 그녀의 뛰어난 의술 덕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과 마찬가지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장석준은 제일 먼저 그녀의 손을 꼭 맞잡고 결혼을 약속하며 평생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겠다고 했었다.
이세인은 지금까지도 장석준의 결의에 가득 찬 눈빛과 울먹거리며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돌아온 건 배신이란 말인가?
날카로운 비수가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고통에 이세인은 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녀가 그를 위해 희생한 모든 것이 보잘 것 없는 먼지처럼 느껴졌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가까스로 힘을 주며 지옥 같은 이곳에서 도망치려 했으나,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말이 다시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석준 오빠, 오늘은 오빠와 세인 씨 결혼기념일이잖아요." 가식적인 목소리가 살랑거리며 들려왔다. "아마 지금쯤 오빠도 없는 집에서 오빠가 돌아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결혼기념일에 집에 가지 않고 나랑 시간 보내도 돼요? 혹시라도 세인 씨가 알게 되면..."
"보미야, 전혀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직 너뿐이야. 이세인은 그저 날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고용인이라고 할까? 그동안 같이 자지도 않았어."
장석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지만, 그가 하는 말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더 이상 밖에서 듣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이세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문을 힘껏 밀치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장석준, 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데, 왜 이렇게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이세인에 장석준은 하던 것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그는 서둘러 이불을 들춰 자신과 옆에 누운 여자의 알몸을 가리며 한껏 불쾌한 얼굴로 이세인을 노려보았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집에서 얌전하게 기다리라고 했잖아."
장석준이 적반하장으로 나올 줄 몰랐던 이세인은 충격에 몸을 비틀거렸다.
하, 고작 이런 사람이었나? 이제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걸까?
야속한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쏟아졌다. 이세인은 입가에 쓴웃음을 띠며 메마른 입술을 힘겹게 열었다. "오늘 들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어?"
장석준은 짜증난 얼굴로 침묵을 지키며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그의 곁에 있던 여자가 어색한 침묵을 깨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석준 오빠는 아무 잘못 없어요. 모든 게 내 잘못이에요. 탓하려거든, 차라리 날 탓하세요."
시선을 옆으로 돌린 이세인은 익숙한 얼굴에 헛웃음이 났다.
장석준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고 자란 윤보미였다.
이세인이 처음 장씨 가문에 방문했을 때, 장석준의 서재 책상 위에는 윤보미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후 두 사람이 결혼을 하면서 그 사진은 사라졌고, 이세인은 장석준이 그녀를 완전히 잊었다고 확신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랑에 눈이 멀어 어리석은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세인은 윤보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장석준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차라리 나한테 이혼하고 싶다고 말하지 그랬어. 굳이 우리 결혼기념일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장석준의 조롱 섞인 비웃음이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흠, 그래? 그럼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해두는 게 좋겠어. 나 너랑 이혼할 거야. 장씨 가문 사모님은 처음부터 네가 아니라 보미였어야 했어."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의 차가운 시선에 이세인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소름 돋을 정도로 차분했다. "그래, 이혼하면 되겠네. 대신 조건이 있어. 재산 절반은 반드시 위자료로 줘야 할 거야. 한 푼이라도 모자라면 그땐 상간소송을 할 거야."
장석준과 윤보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믿는 구석도 없는 고아 주제, 무슨 자격으로 장씨 가문의 재산을 절반이나 원하는 걸까?
정말이지 터무니없는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입가에 조롱 섞인 웃음이 번진 윤보미가 가식적인 목소리로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척했다. "세인 씨, 욕심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그동안 석준 오빠가 벌어온 돈으로 생활하며 부족한 것 없이 지냈잖아요? 장씨 가문에서 여태껏 사모님 대접을 받았으면 감사히 생각하고 서로 보기 좋게 헤어지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이대로 장씨 가문과 완전히 연을 끊을 거예요?"
이세인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더니 경멸이 어린 눈빛으로 두 사람을 흘겨봤다. "내연녀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설교하는 거지? 분명히 말하는 데, 난 지금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야. 오늘 일이 소문이라도 퍼지면, 창피를 당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너희 둘이란 걸 명심해."
그녀의 말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뒤돌아서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밤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이세인은 조금 망설이는 것 같더니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전화는 빠르게 연결되었고, 전화기 너머에서 흥분에 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인 누나? 정말 세인 누나예요? 드디어 내 생각이 난 거예요?"
"그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 그녀가 담담하게 말을 이어 했다. "나 지금 장석준 개인 별장 앞에 있어. 주소 보내줄 테니까 데리러 와."
"네. 지금 바로 출발할게요."
통화를 마치고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고급 세단 여러 대가 빠른 속도로 진입하더니 이세인 앞에 연달아 멈춰 섰다.
세단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자 이세인의 얇은 입술을 비집고 자조적인 실소가 터져 나왔다.
결국 자신을 배신한 남자를 위해 스스로를 암흑 속에 가두고 미련하게 부속품처럼 지내왔다.
정말이지 바보 같은 삶이 따로 없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현실에 눈을 떴으니, 늦지 않았다.
"누나." 하윤슬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빠르게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누나 울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이세인의 앞에 멈춰 선 하윤슬은 그녀의 얼굴에 남은 선명한 눈물 자국을 발견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약한 소리 한번 하지 않던 세인 누나가, 울고 있다고?
손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낸 이세인이 애써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 나 이혼하려고."
"네? 이혼이요?" 충격 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뜬 하윤슬은 한참이 지나서야 생각을 정리한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잘 생각했어요. 드디어 내가 알던 사람으로 돌아온 것 같네요. 지옥 같은 장씨 가문에서 벗어난 걸 축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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