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익!
저택의 문이 갑작스레 열렸다.
소파에 늘어져 있던 권유빈은 문 쪽을 향해 기계처럼 고개를 돌렸다. 윤정우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30분 전, 권유빈은 남편 윤정우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임효주가 수혈이 또 필요하다며 준비해 달라는 명령이었다.
임효주, 윤정우의 애인.
두 여자는 모두 희귀한 HR 네거티브 혈액형을 갖고 있었고, 윤정우가 반드시 권유빈을 끌고 와서 자신에게 혈액 기증을 할 것이라고 임효주는 잘 알고 있었다.
권유빈이 적절한 복장을 입고 있는 모습을 보자, 윤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 가자."
권유빈은 남편의 얼굴을 흘끗 바라봤다. 잘 빠진 검정색 양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조각상 같았다.
권유빈에게 있어서 윤정우는 3년 동안 자신의 모든 사랑과 마음을 바친 남자였지만 윤정우에게 있어서 권유빈은 그저 숨쉬는 혈액은행 뿐이었다.
그녀 역시도 빈혈을 앓았으며 수혈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윤정우는 잘 알고 있었으나,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권유빈의 가슴은 미어졌지만 그래도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을 표했다. "보통 수혈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 되어 있잖아. 이제 수혈한 지 2주밖에 안 지났는데, 이렇게까지 하면 내 몸에 어떤 무리가 가는지는 알아?"
"윤정우, 내가 죽는 걸 바라기라도 하는 거야?"
윤정우는 코웃음을 치며 경멸 가득한 눈빛을 보였다. "왜 갑자기 그래? 분명 우리가 이혼만 안 한다면 언제든 피를 주겠다고 하지 않았나? 왜?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거야?"
권유빈은 주먹을 꽉 쥐었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하얗게 변했다.
수혈한 이후 그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마주한 적도 없으면서, 한 번 반기를 들었다고 이렇게 짜증을 내는 윤정우의 모습에 권유빈은 실망했다.
조금이라도 동정의 눈길을 받길 원했으나, 결과는 정 반대였다.
권유빈의 언짢은 듯한 표정을 보자, 윤정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거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나에게 있어서 가치 있는 건 오직 네 몸의 피 뿐이야. 효주가 아니었다면 네가 그 사모님 자리를 지금까지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어?"
그의 날카로운 말들은 권유빈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그의 시선에 비친 권유빈은 그저 질투심이 가득하고 남의 목숨을 멸시하며 속이 좁은 독한 여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목숨은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만약 하기 싫으면 결혼이고 뭐고 다 관두자."
그 냉담한 말들은 권유빈의 정신을 번쩍 뜨이게 했다. 결국 이날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그녀의 입술에는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신체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손해를 보면서 이렇게 순종적인 와이프 역할을 해서 그녀가 얻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녀는 심호흡을 쉬며 서랍에서 서류 하나를 꺼냈다.
상단에는 다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혼 계약서.
이미 그녀는 자신의 서명란을 채워 두었다.
윤정우는 충격에 눈을 휘둥그래 떴다.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권유빈이 먼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하는 대로 난 알몸으로 나갈 거야. 너에게 빚진 건 그 동안 내 건강으로 다 갚은 것 같아. 이제 여기까지 하자. 윤정우, 널 놔줄게. 부디 다시 만나지 말자."
1시간 이후, 그녀는 저택을 나왔다. 그녀가 짐을 챙기는 내내 윤정우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기회를 주었다. 만약 임효주에게 수혈을 해주기로만 한다면, 이 모든 일을 없던 일로 하자는 것이었다.
권유빈은 비웃음을 짓기만 했다. 정말로 그녀가 계속해서 그렇게 손해를 보는 짓을 하며 희생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인가?
이렇게까지 상처를 받은 지금, 그녀에게는 후회란 없었다.
갑작스러운 휴대폰의 벨소리가 권유빈의 귀에 닿았다. 발신자를 확인하고서는 잠시 망설이다가, 마침내 전화를 받았다.
"또 무슨 일입니까?"
전화를 건 사람은 기운 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사장님, 폐를 끼쳐서 정말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 이 아수라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나서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