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성, 심씨 가문 저택.
1층의 호화로운 거실에는 와인을 든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고, 거실 입구 위에는 큼지막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사랑하는 딸, 집에 돌아온 거 축하해."
그 시각, 낮고 답답한 3층 다락방에서 서상은은 조용히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심씨 가문의 심진우가 서 있었고 그의 손엔 얇은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치 무척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그 봉투를 서상은 앞 책상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상은아,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니?" 우리 친딸을 다시 찾긴 했지만... 네가 굳이 나갈 필요는 없어. 우리 형편에 너 하나 더 보살핀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건 없어. 나는 정말 네가 계속 있었으면 좋겠어. 나나 네 엄마도 여전히 너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고... 꼭 떠나야겠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너희 본가 사정이 워낙 힘든 건, 너도 알잖아. 널 데리고 갈 차도 못 보낼 거 같으니, 이 돈이라도 받아. 교통비로 써."
서상은의 시선이 봉투에 잠시 머물렀다. 두께로 보아 안에 든 돈은 20만 원도 안 될 듯했다. 그녀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봉투를 다시 심진우의 쪽으로 밀었다. "괜찮아요. 부모님께서 이미 차를 보내주셨어요."
속으로는 냉소가 피어 올랐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우스운지. '한쪽으론 붙잡는 척하면서, 왜 교통비까지 챙겨줘? 결국 내쫓겠다는 말이잖아.'
서상은은 두 살이 갓 지났을 무렵, 심씨 가문에 입양되었다. 백미정이 출산 당일 병원에서 아이를 아이를 잃고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때였다. 그 슬픔을 덜기 위해 입양을 택했고, 서상은은 실종된 딸의 대체품에 불과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심씨 가문의 딸로서 인정받은 적은 없었다. 유년기의 그녀는 늘 시장에서 산 헌 옷을 입고, 남은 밥을 먹으며, 온갖 허드렛일까지 하며 심씨 가족의 하녀처럼 살아왔다.
그러다 어느 날, 심진우가 그녀의 뛰어난 디자인 재능을 눈치채게 됐다. 그녀가 무심히 낙서한 자동차 스케치조차 전문가 수준을 능가했고, 당장이라도 시장에 팔릴 수 있을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심씨 가문은 그녀의 학업을 중단시켰고, 자동차 부품 도면은 물론, 차량 전체 설계까지 맡기며 그녀를 집 안에 가둬두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한 설계들 덕분에, 심씨 가문은 해성 상류층 사회에 발을 들일 수 있었고, 오늘처럼 유력 인사들을 초대해 친딸을 환영하는 화려한 파티를 열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그녀의 능력 덕분이었다.
근데 이제 와서 조금 돈을 벌었다고 그녀를 쫓아내다니. 정말이지, 참 배은망덕한 가족이다.
심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봉투를 그녀의 가방 속에 넣었다.
"차를 보냈다고? 말도 안 돼. 그쪽 집안 형편을 내가 좀 알아봤는데, 아들만 둘에 삼촌은 병석에 누워 계신다고 들었어. 시골에서 어렵게 사시는 분들이야. 너를 데리러 올 여유는 없을 거야. 여기선 돈 걱정 없이 살았지만, 거기 가면 굶을 수도 있어. 이 돈, 꼭 챙겨 가."
서상은은 다시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옆에 서 있던 심혜주가 그녀의 가방 옆 주머니에 뭔가를 슬쩍 밀어 넣는 것을 보지 못했다.
서상은은 검은색 백팩을 메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단호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심진우의 와이프 백미정은 그녀의 뒷모습을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다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저것 좀 봐! 개를 키웠어도 꼬리라도 흔들 텐데, 20년을 키워줬는데 고맙단 말 한마디 없이 그냥 가버리네! 저런 건 거리에서 굶어 죽어야 정신 차리지!"
그 옆에서 심혜주가 조용히 팔짱을 끼고 부드럽고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엄마,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상은 언니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 못 하고 10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해왔잖아요. 예절 같은 건 배울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우리 집에서 나가면…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힘들 거예요. 이렇게 좋은 집을 떠나는 게 무섭고 속상하겠죠. 그 마음 이해해요. 제가 언니 배웅하고 올게요!"
백미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혜주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 "뭘 하러 따라가? 저런 몰염치한 애한테는 정 줄 필요도 없어."
그러자 심혜주는 달콤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그래도 제가 돌아온 이후에, 상은 언니가 저한테 잘해줬어요.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작별 인사 정도는 해야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보석함을 살짝 흔들며 착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게다가, 언니한테 줄 선물도 있거든요."
그 말과 함께 그녀는 계단 아래로 빠르게 달려갔고 심진우와 백미정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언니!" 심혜주는 서상은을 향해 달려가며 다정하게 외쳤다. "이렇게 서둘러 가버리면 어떡해요? 선물도 안 줬는데요."
그녀는 빨간색 사각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에는 매끄럽고 빛나는 흰 옥 팔찌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물건이었다.
서상은은 눈을 내리깔아 팔찌를 살폈다. 아마 팔면 목돈이 될 만큼 꽤 비싸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어. 네가 차고 다녀."
심혜주는 진심 어린 표정으로 상자를 그녀 손에 꼭 쥐여주며 간곡하게 말했다. "그래도 가져가요. 제가 2000만 원 넘게 주고 산 팔찌예요. 혹시라도 어려운 일 생기면… 이거라도 팔아요.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아무리 못해도, 나중에 시집갈 때쯤이면 꽤 괜찮은 혼수로 쓸 수 있을 거예요."
서상은이 다시 거절하려 하자, 심혜주는 빠르게 상자를 닫아 그녀의 백팩에 직접 넣어버렸다.
그때,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보모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 "아가씨! 큰일 났어요! 송 도련님이 선물한 약혼 예물 목걸이가…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