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시월에게 있어, 차욱은 따뜻한 해빛같은 존재였다. 얼어 죽어가는 어린 시월에게 천사처럼 나타난 소년. 나중에, 차욱이 차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고 민시월은 망설임 없이 차씨 가문으로 시집 와서 자신의 타고난 의술로 차욱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2년 동안 가족과 남편에게 모든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국 한마디의... “지루하다...” 이건 차욱이 민시월에게 준 평가였다. 화장도 평범하고 스타일도 촌스럽고 성격도 답답한 게 볼 적마다 고구마 먹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신채희가 돌아온 후, 차욱은 바로 뜨거운 새 사랑을 시작했다. 신채희, 여우같은 여자. 이혼 서류에 서명을 한 민시월은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눈에 띄는 드레스, 브라운 긴 머리, 빨간 입술에 크고 매혹적인 눈. 이게 바록 진정한 민시월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또 뭐가 있을까?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해킹 천재, 최고의 레이싱 선수, 국제에서 이름이 난 신의... 그리고 그녀 곁에 실력만큼 대단한 미모를 가진 남자가 나타났다. 자신의 것이 빼앗긴 느낌이 든 차욱은 민시월을 붙잡으려 했지만 더 큰 손이 먼저 차욱의 손목을 잡았다. “제 와이프입니다.”
은은한 조명이 드리운 방 안, 넓은 침대 위에서 남녀가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침대 위 벽에는 한 여자의 웨딩 사진 액자가 걸려있었고, 사진 속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자기 침대에서 이러고 있는 걸 민시월이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일까요? 아마 울고 불고 난리 치겠죠?" 침대 위 여자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있었다.
"그 여자 침대 아니야. 같이 이 침대에 누워본 적이 없거든. 줄곧 옆 방에서 잤어."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 차욱 씨가 너무 좋아요..."
두 사람의 속삭임은 점차 거친 숨소리에 파묻혀 사라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문 앞에서 입을 틀어막고 선 여자는 숨죽인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절정에 닿은 두 사람은 기진맥진한 채로 침대 위에 뻗어져 있었다.
차욱은 대충 반바지를 주워 입고 물 마시러 나갔다. 거실에 조용히 앉아 있는 민시월의 모습을 본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언제 들어왔는지, 어디서부터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 들었어?" 차욱은 물 한 컵을 들고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목 주변에 키스 마크가 선명했지만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태연하게 물을 한 모금 마신 그는 말했다.
"서명해 줘." 그는 서랍에서 서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던졌다. "당신도 다 들었잖아. 결혼을 유지하는 건 아무 의미 없어."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서류를 확인했다. 이혼 서류였다. 맨 마지막 장 아래에는 차욱의 서명이 있었다.
"읽어봐. 원하는 조건 있으면 얘기하고. 없으면 그냥 지금 서명해." 그는 명령조로 말했다.
그리고는 소파에 기댄 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거실에는 곧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라 그의 냉담한 표정을 가렸다.
"정말 한치의 여지도 없는 건가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떨리는 목소리였다. 안경 밑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차씨 가문의 일원이 되고나서 심혈을 기울여 남편에게 잘해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어린 시절 눈보라에 휩싸여 죽을 뻔 했던 자신을 구해준 소년에 대한 기억으로 모진 수모를 견뎠다. 조금이라도 더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민시월, 왜 자꾸 고집부려? 나랑 채희가 어떤 사이인지 알잖아. 차 사모님 신분이 그렇게 포기가 안돼? 역겹게 굴지 마." 그는 담뱃재를 털며 조급하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 결혼은 서로가 필요한 걸 얻기 위해서잖아."
그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차욱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신채희였다. 그제서야 민시월은 깨달았다.
머리를 숙인 그녀는 옷자락을 꽉 잡았다. 신채희가 나타날 때마다 차욱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몇 년 전이었다. 그는 해외로 떠나는 신채희를 붙잡으러 가는 길에 교통 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다. 차욱은 민씨 가문의 민소라와 결혼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민소라가 다른 남자와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민시월이 대신 차욱과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민시월은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디자인, 레이싱, 메스, 코딩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이 모든 걸 내려놓고 오직 차욱에게만 집중했다.
1년 전 그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에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은 민시월이었다. 하지만 신채희가 돌아온 이후로 차욱은 180도 달라졌다.
2년 간의 결혼 생활 동안 지극 정성으로 보살폈음에도 그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아무 대답도 얻지 못하자 차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민시월을 쳐다봤다.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긴 앞머리와 커다란 안경도 그녀의 엄청난 미모를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평소에 잘 꾸미지 않아 늘 흐트러져 있고 깔끔해 보이지 않았다. 민시월의 성격도 답답하고 고리타분했다.
차욱은 의식을 되찾은 뒤 매일 민시월과 함께 지냈지만 전혀 설레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지루한 여자였다.
나날이 반복되는 관심과 보살핌, 그리고 변함없는 외모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가 2년 간 들인 정성은 인정하지만 남은 인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었다.
담배를 지지며 그가 무심히 입을 열었다. "여긴 차씨 가문 집이야."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저자세는 차욱을 더 짜증나게 만들었다.
"민씨 본가에서 있었던 일은 내가 잘 알지. 이혼해주면 고급빌라 세 채와 현금 60억 원을 줄게. 갖고 싶은 차 있으면 아무거나 골라 가져가도 돼. 이 정도면 남은 인생을 꽤 여유롭게 살 수 있지 않겠어?"
자신이 혼수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고,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재활을 도와준 그녀의 진심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비록 민시월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지만 2년 동안의 헌신에 대해서는 적당한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가장 눈부실 나이에 2년 이라는 긴 시간을 자신을 위해 바친 건 대단한 일이었으니.
팔짱을 끼고 있는 그를 힐끔 쳐다본 민시월은 그의 쇄골에 새겨진 작은 문신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더욱 괴로워졌다. 신채희의 이니셜 CH가 새겨져 있었다.
차욱의 인내심도 서서히 바닥나기 시작했다. "하루만 더 생각해봐. 마음에 안 드는 내용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그렇다고 너무 무리한 요구는 안돼. 나 참는 거 잘 못하는 거 알지?"
"지금 서명할게요." 민시월은 펜을 들고 이혼 서류에 서명했다. "짐 싸서 나갈게요. 앞으로 당신 앞에 나타날 일 없을 거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
자신의 말에 한 번도 반박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금방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무뚝뚝한 사람과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될까 봐 두려웠다. 사랑은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차욱이 이혼 합의서를 보며 뭔가 말하려는 순간 흰 셔츠를 걸친 신채희가 방에서 우아하게 걸어 나왔다.
루즈한 셔츠는 엉덩이를 겨우 가릴 정도였다. 풀어헤친 단추 사이로 쇄골이 드러났다.
피부에 살짝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은 섹시한 매력을 돋보이게 했다.
차욱의 셔츠였다. 민시월은 그녀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고 신채희는 잘난 체 하며 한 쪽 입 꼬리를 올렸다.
차욱이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바로 입 꼬리를 내린 채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시월 씨, 얘기 많이 들었어요. 전 신채희 라고 해요." 그녀는 차욱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말랑하게 그의 어깨에 몸을 붙였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시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채희가 장난스럽게 차욱의 옆구리를 찔렀다. "오빠가 이혼하면 시월 씨한테 빌라 세 채 준다면서요? 호수 별장은 내가 갖고 싶어했던 거 잖아요? 잊었어요? 설마 사랑이 식은 건 아니죠?"
그녀의 말에 차욱은 곧장 말을 바꾸었다. "흠... 아무래도 약속한 빌라 말고 다른 걸로 해야겠네."
민시월은 안경 사이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한테 준다고 약속 했었잖아요."
옆에서는 신채희의 징징거림이 더 심해졌다. "차욱 오빠..."
그는 조금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민시월을 향해 말했다. "내가 방금 말한 거 못 들었어? 주는 대로 받아. 괜히 나중에 내 마음 바뀌면 후회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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